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황동규 시인의 편지D.사소한 일상/시 2014. 4. 11. 22:41
오늘이 오늘 같지가 않습니다.
진달래는 마음먹고 눈 주기 전에 사라지고
라일락 향도 열어 논 연구실 밑을 그냥 스쳐가고
신록도 안구(眼球) 몇 뼘 앞에서 계속 맴돕니다.
연못가에 영산홍이
가화(假花)처럼 낯설게 피어 있군요.
이번 주말엔
얼마 전 항구 일 치웠다는, 이십년 전에 들어가 본
서해안의 조그만 포구에 가겠습니다.
배들이 사라졌더라도 배 매던 자리는 남아있겠지요.
콘크리트 4발이를 얽어 만든 엉성한 방파제 앞 술집에서
바다가 숨을 죽일 때
쭈꾸미 안주로 소주를 마시다 나와
밀물이 밀어오는 걸 보겠습니다.
조개, 게, 물새들이 뻘 위에 새겨 논 온갖 형상들이
물 맞고 풀어지는 것을 보겠습니다.
사라지기 직전까지만 보겠습니다.
나머지는
평생을 허리 구부리고 보낸 할미꽃 막판에 꼿꼿이 서듯
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표표히 서서
망각하겠습니다.2003年 봄 편지
김수명 선생에게─
황동규─